학사모는 왜 네모날까? — 중세 수도사의 책에서 졸업식 무대까지

2026. 6. 2. 16:11·사물 유래·상식
사물 및 상식의 유래 · 학사모의 기원

매년 졸업 시즌이 되면 전 세계 대학교 캠퍼스에 똑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학생들이 일제히 네모난 판자를 머리에 올리고 술을 늘어뜨린 채 환하게 웃는 장면이죠. 그런데 잠깐, 왜 하필 네모일까요? 왜 그 위에 술이 달려 있을까요? 그리고 왜 이 모자가 전 세계 졸업식의 상징이 됐을까요? 800년 전 중세 유럽의 좁은 수도원 방에서 그 답이 시작됩니다.

 

사물 및 상식의 유래 · 학사모 · 읽는 시간 약 8분 · Mortarboard · Academic Cap · Birrus
"모자 하나에 800년의 역사가 담겨 있다. 네모난 판자 위에 올려놓은 건 비단 술이 아니라, 지식을 향한 인류의 오랜 경의였다." — 학사모(mortarboard)의 역사적 의미

① 그거 왜 그래? — 왜 하필 '네모'여야 했을까

학사모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사람 머리는 동그랗습니다. 그런데 왜 졸업 모자는 네모날까요? 둥근 야구 모자도 아니고, 챙이 넓은 중절모도 아니고, 굳이 딱딱한 정사각형 판자를 머리 위에 얹어야 하는 걸까요? 거기다 한쪽에 술까지 달아서 말이죠.

매년 2월과 8월이면 전국 대학교에서 수만 명의 졸업생들이 이 네모난 모자를 씁니다. 사진을 찍고, 모자를 하늘로 던지고, SNS에 올립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거 왜 네모지?"라고 묻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하게 여기니까요. 그런데 이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이 모자의 모양에는 생각보다 훨씬 긴 역사와 여러 가지 설이 얽혀 있습니다.

학사모의 정식 영어 명칭은 모르타보드(mortarboard)입니다. '회반죽판'이라는 뜻이죠. 벽돌을 쌓을 때 시멘트나 회반죽을 얹어 나르는 네모난 판자 도구와 생김새가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지식의 전당에서 쓰는 모자가 공사장 도구에서 이름을 따왔다니 — 이미 뭔가 심상치 않죠?

· · ·

② 우리가 알고 있던 것 — "원래 다 그런 거 아니야?"

학사모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원래 졸업 모자가 저렇게 생긴 거 아니야?" 혹은 "서양 전통인 거 같던데, 옛날부터 그랬겠지"라고요. 일부는 "귀족이나 왕족이 쓰던 모자에서 유래했을 거야"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모두 어느 정도 방향은 맞지만, 실제 기원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흥미롭습니다.

흔한 오해
귀족 문화에서 시작됐다

왕이나 귀족이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쓰던 특별한 모자가 대학으로 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 기원
성직자·학자의 모자가 기원

중세 성직자와 수도원 학자들이 쓰던 두건(birrus)이 점차 변형되며 오늘날 학사모가 됐다

흔한 오해
네모 모양은 의미 없다

그냥 디자인일 뿐, 특별한 상징적 의미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 의미
책·지식·사각 세계의 상징

사각형은 책 표지, 지식의 네 꼭짓점(지·덕·체·인), 세상의 네 방향 등 다양한 상징적 해석과 연결된다

가장 중요한 오해는 학사모가 처음부터 지금 같은 모양이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실제로는 수백 년에 걸쳐 천천히, 그리고 꽤 우연한 계기들이 겹치면서 지금의 형태가 굳어졌습니다. 그 변화의 여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 · ·

③ 진짜 기원 — 수도원의 두건에서 대학 강단으로

비루스 입은 성직자-핀터레스트

이야기는 12~13세기 중세 유럽의 대학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볼로냐(이탈리아), 파리(프랑스), 옥스퍼드(영국) 등에 세계 최초의 대학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 초창기 대학들의 교수와 학생들은 대부분 성직자이거나 성직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교육은 곧 교회의 영역이었으니까요.

당시 성직자들은 비루스(birrus)라는 두건을 쓰고 다녔습니다. 추운 유럽의 겨울, 냉난방 시설 하나 없는 돌로 지은 수도원과 강의실에서 머리를 따뜻하게 감싸주던 실용적인 모자였죠. 이 두건이 대학 문화에도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였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교육의 언어는 라틴어였고, 지식을 다루는 자들은 교회와 수도원에 속해 있었다.
학자와 성직자는 거의 같은 말이었다 — 그래서 학자의 복장은 곧 성직자의 복장에서 출발했다.

14~15세기를 거치면서 대학이 점점 교회로부터 독립적인 기관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학자들도 고유의 복장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건의 모양이 조금씩 변형되었습니다. 특히 15세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두건 위에 딱딱한 판이 붙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훗날 학사모의 네모난 판 부분의 전신으로 여겨집니다.

또 하나의 유력한 기원설은 책(Book) 기원설입니다. 인쇄술이 없던 중세에 필사본 책은 매우 귀했고, 학자들에게는 사실상 신성한 물건이었습니다. 책의 표지는 사각형이었고, 일부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에 대한 헌신의 의미로 책 형태를 모자에 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낭만적인 해석에 가깝지만, 꽤 많은 학자들이 이 상징성에 동의합니다.

· · ·

④ 결정적 순간 — 지금의 형태로 굳어진 세 가지 계기

학사모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딱딱한 네모 판 + 술 달린 모자의 형태로 굳어진 데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1321년 — 볼로냐 대학의 학위복 규정

세계 최초의 대학인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의 공식 복장을 규정하는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학문적 지위를 복장으로 구분하는 전통이 시작됐으며, 두건 형태의 모자가 공식 복장의 일부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1530년대 — 옥스퍼드의 사각 모자 정착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네모난 판이 달린 모자 형태가 교수들 사이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이를 'square cap' 또는 'corner cap'이라고 불렀으며, 딱딱한 판 위에 부드러운 천이 덮인 초기 형태였습니다. 이것이 훗날 모르타보드의 직접적인 전신입니다.

 
1895년 — 미국 학위복 표준화 위원회

미국 대학들이 제각각 다른 학위복을 입던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The Intercollegiate Bureau of Academic Costume'이 설립됐습니다. 이 위원회가 학사·석사·박사의 모자, 가운, 두건 색깔을 표준화하면서 네모난 학사모(mortarboard)가 학사 학위의 공식 모자로 확정됐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졸업식 문화의 뿌리가 된 결정적 순간입니다.

 
20세기 — 미국식 졸업 문화의 전 세계 확산

20세기 초·중반 미국이 교육 강국으로 부상하고, 할리우드 영화와 대중문화를 통해 미국식 졸업식 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한국도 광복 이후 미국식 대학 교육 제도를 도입하면서 학사모 전통이 자연스럽게 정착됐습니다.

· · ·

⑤ 전 세계로 퍼진 이유 — 술의 방향까지 통일된 사연

학사모의 술

학사모가 전 세계 표준이 된 데에는 단순히 영국과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만 작용한 게 아닙니다. 이 모자가 담고 있는 상징성이 문화권을 초월해 공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네모난 판은 지식과 책을, 드리운 술은 학문적 겸손과 성취를, 그리고 검은색 가운과 모자는 지혜와 엄숙함을 상징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술(tassel)의 위치입니다. 학위를 받기 전에는 술을 오른쪽에 늘어뜨리고, 학위증을 받는 순간 왼쪽으로 넘기는 퍼포먼스를 졸업식마다 합니다. 이 전통은 의외로 꽤 최근인 20세기 초·중반에 미국에서 정착된 것으로, 학위 취득의 전과 후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연출입니다. 졸업식을 하나의 '의례(ritual)'로 만들고자 한 교육자들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학사모 각 부위의 상징

🟫 네모난 판(board) — 책, 지식, 학문을 상징. 사각형은 완성과 안정을 나타내는 기하학적 상징이기도 하다
🖤 검은 천(cap) — 지혜, 엄숙함, 그리고 모든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보편성을 상징. 중세 성직자 복장에서 이어진 색
🟡 술(tassel) — 학문적 성취의 장식이자 신분 전환의 상징. 색깔로 전공 계열을 구분하기도 한다
🔄 술 넘기기(turning the tassel) — 학위 수여 순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며 '학생에서 졸업생으로'의 전환을 의례화한 동작

학사모가 전 세계로 퍼진 또 다른 이유는 사진 문화의 발달입니다. 20세기 초 사진이 대중화되면서 졸업 사진이 인생에서 중요한 기념 촬영이 됐고, 이때 학사모는 "졸업"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시각적 아이콘이 됐습니다. 이후 영화, 광고, 만화 등 대중문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전 세계 어디서나 '이 모자 = 졸업'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됐습니다.

· · ·

⑥ 우리나라 버전 — 한국 학사모의 특이한 점들

한국에 학사모가 도입된 것은 광복 이후 미국식 대학 교육 시스템이 자리 잡기 시작한 1940~50년대입니다. 이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대학 복장 문화가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유교적 관복 문화가 졸업·수료식을 대신했습니다.

한국의 학사모 문화에는 몇 가지 독특한 요소가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학사모 꾸미기 문화입니다. 서양 졸업식에서 학사모는 비교적 단정하게 유지되는 편이지만, 한국에서는 학사모에 스티커, 문구, 사진, 심지어 미니어처 조형물까지 붙이는 화려한 개성 표현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취업 준비, 고마운 사람들 이름, 자신의 꿈을 적어 넣기도 하죠.

학사모 꾸미기는 한국 졸업식만의 독특한 문화다.
서양에서 엄숙한 의례의 상징이었던 모자가 한국에서는 개인의 스토리를 담는 캔버스로 재해석된 셈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학사모를 하늘로 던지는 퍼포먼스가 졸업식의 하이라이트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전통은 미국의 군사 학교인 아나폴리스 해군 사관학교에서 1912년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졸업 후에는 더 이상 모자가 필요 없어진 사관 생도들이 학사모를 하늘로 던져 축하한 것이 기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일반 대학으로 퍼지면서 전 세계 졸업식의 명장면이 됐고, 한국에서도 정착됐습니다.

한편 한국의 박사 학위복은 학교마다 색깔이 달라 자신의 학교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고려대학교는 빨간색, 연세대학교는 파란색, 서울대학교는 짙은 남색 계열 등 각 대학의 교색(校色)이 학위복에 반영되는 것이 한국만의 특징입니다.

· · ·

⑦ 연결된 상식들 — 학사모에서 뻗어나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

학사모의 기원을 알고 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흥미로운 상식들이 있습니다.

학사모에서 뻗어나가는 상식 3가지

🎓 술 색깔이 전공을 말한다
미국에서 학사모의 술(tassel) 색깔은 전공 계열을 나타냅니다. 파란색은 철학·교육학, 황금색은 공학, 흰색은 예술·인문학, 녹색은 의학·약학, 주황색은 법학 등으로 구분됩니다. 한국은 대부분 검은색이나 학교 색깔로 통일하는 경향이 있어 이 구분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 '모르타보드'와 공사장 도구의 관계
학사모의 영어 이름 'mortarboard'는 회반죽(mortar)을 얹어 나르는 네모난 판자 도구와 모양이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이 명칭이 처음 문서에 등장한 것은 1854년 영국에서 간행된 기록으로, 그 전까지는 'square cap', 'Oxford cap', 'corner cap' 등 다양하게 불렸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이 이름을 꽤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판사의 모자도 같은 뿌리
영국 법원에서 판사가 쓰는 가발(wig)과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의 '비레타(biretta)' 모자도 중세 학자 복장에서 같은 뿌리를 갖습니다. 특히 비레타는 학사모보다 좀 더 부드러운 형태의 사각 모자로, 지금도 가톨릭과 성공회 성직자들이 공식 행사에서 착용합니다. 교수, 판사, 성직자의 모자가 모두 한 조상에서 나온 셈입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1912년 미 해군 사관학교 아나폴리스의 졸업식에서 처음 학사모를 하늘로 던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 퍼포먼스 하나가 전 세계 졸업식의 클라이맥스가 됐다.

· · ·
학사모가 남기는 질문들

① 왜 박사는 사각 학사모 대신 팔각이나 원형 모자를 쓰는 대학도 있을까?
② 온라인 졸업식이 늘어나는 시대에 학사모는 앞으로도 살아남을까?
③ 한국의 학사모 꾸미기 문화처럼, 세계 각국에는 또 어떤 졸업식 전통이 있을까?
④ 중세 수도사들이 지금의 졸업식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다음 졸업식에서, 그 모자를 다시 보게 될 거예요

이제 학사모를 보면 800년 전 중세 수도원의 차가운 돌바닥이 떠오를 겁니다. 추위를 막으려고 두건을 뒤집어쓴 채 필사본을 베끼던 수도사들, 그리고 그 두건이 조금씩 변형되어 오늘날 전 세계 젊은이들의 머리 위에 올라오기까지의 긴 여정이요. 별생각 없이 썼던 네모난 판자 모자 하나가 사실은 인류가 지식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800년짜리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런 궁금증이 생기지 않나요? 졸업 가운은 왜 하필 검은색 긴 가운일까요? 그리고 옷깃에 달린 알록달록한 두건(hood)의 색깔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학위복의 비밀은 사실 아직 절반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사물 유래·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택배 박스는 왜 항상 갈색일까? — 포장재 색깔에 담긴 의외의 과학  (0) 2026.05.31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었다 — 뜨거운 방 안에서 찬 국수를 먹던 조선의 역설  (0) 2026.05.28
매일 만지면서 한 번도 안 궁금했던 것 — 100원짜리 동전에는 왜 하필 이순신 장군일까?  (0) 2026.05.23
'사물 유래·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택배 박스는 왜 항상 갈색일까? — 포장재 색깔에 담긴 의외의 과학
  •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었다 — 뜨거운 방 안에서 찬 국수를 먹던 조선의 역설
  • 매일 만지면서 한 번도 안 궁금했던 것 — 100원짜리 동전에는 왜 하필 이순신 장군일까?
라이프 로그
라이프 로그
한번쯤 의문은 들었지만 딱히 관심 없었던 내용 이 곳에서 풀고 가시길 바랍니다.
  • 라이프 로그
    그거 왜 그래?
    라이프 로그
  • 전체
    오늘
    어제
    • 분류 전체보기 (12)
      • 사물 유래·상식 (4)
      • 인체·생활 현상 (4)
      • 1분 해결 사전 (4)
  • 블로그 메뉴

    • 홈
    • 태그
    • 방명록
  • 링크

  • 공지사항

  • 인기 글

  • 태그

    학사모유래
    알면유용한상식
    입모반사
    인체의비밀
    박스색깔
    생활꿀팁
    칼날세우기
    사물의유래
    청바지주머니
    주방꿀팁
    포장재역사
    작은주머니
    이거왜그래
    생활과학
    숫돌없이칼갈기
    소름돋는이유
    기압과몸
    생활상식
    지퍼고치기
    지퍼문제해결
    지퍼내려감
    뇌과학
    일상속사실
    1분해결
    중세대학
    골판지상식
    1분궁금증
    패션잡학
    저기압증상
    잡학상식
  • 최근 댓글

  • 최근 글

  • hELLO· Designed By정상우.v4.10.6
라이프 로그
학사모는 왜 네모날까? — 중세 수도사의 책에서 졸업식 무대까지
상단으로

티스토리툴바